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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제일경제신문] 자연과 전통을 도자에 담아내는 장안요 젊은 꾼

2015-04-20

[주경업이 만난 문화지킴이들] - (39) 도예가 신경균

  
봄 나물로 가득찬 아침상 앞에 마주 앉은 도예가 신경균 씨.

4월의 봄 기운이 움트는 장안사 가는 길은 흩날리는 벚꽃들로 가관이다. 하장안 표지석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마을로 들어와 다리를 건너 왼쪽 고샅길에서 장안요(長安窯)를 만났다. 내 건너 들판에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의 하장안당산이 건너다 보이는 곳이다. 전시장 황토방에 안내되어 안주인이 내오는 정갈한 다담상을 받는다. 하얀 가루 덮힌 곶감은 살이 팥앙금 같아 은은한 초콜릿 맛이 난다. 참감을 깎아 저온 창고에서 3년 숙성한 것이란다. 버찌과자와 더불어 보이차가 묘한 맛을 연출한다.
 방 구조를 재미있게 꾸민 2층 전시장엔 주인 신경균 씨가 만든 사발(茶碗)을 비롯한 작품들과 고려 백자와 송나라 여인상(소품) 그리고 여행 중 수집한 30여 작품들이 옛 가구 위에 놓여 있다. 뛰어난 예술가는 가장 훌륭한 컬렉터라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물레에 앉아 일하고 아침 8시 넘어 쉬고 있던 신경균 씨 안내로 본채로 옮겨와 점심상을 받았다. 텃밭에서 난 오가피 나물과 두릅. 머귀가 오르고 다시마·미역이 곁들여진다. 봄이 상 위에 한 상 가득 찼다. 두릅을 초장에 찍어 보란다. 남자들은 일을 하니까 부드럽게 먹어야 한단다. 2년 삭힌 전어 밤젓과 서산 조개젓갈이 미각을 도운다. 이른 새벽 맑은 정신으로 작업하고 봄나물 곁들인 막걸리 한 잔은 모든 피로를 잊게 해준단다.
 신경균(申京均·47)은 부산 도예가의 효시 신정희 선생의 4남 1녀 중 3남으로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좋아 외갓댁에서 살다시피했다. 아버지는 문경에서 도자기 작업하고 자녀들은 학교진학을 위해 어머니와 더불어 부산에 보내어졌다. 문현동 지겟골에서의 생활은 어려웠다.
 대연연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중 2학년 때 아버지가 통도사 인근에 가마를 설치하면서 주말에는 작업장에 가서 살았다. 아버지를 졸라 물레에 올랐으나 키가 작아 발이 물레에 닿지 않으니 서서 물레를 돌렸다. 그렇게해서 가도 흙 만지고 물레 돌리는 것이 마냥 좋았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아버지의 작업을 이해하고 닮고 싶어했던 신경균이 부산공예학교 도자과에 진학(1979년 6기 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었다. 1982년 경성대 공예학과에 진학하여 도자기를 전공한다.
 부친의 사랑은 어릴 때부터 각별했다. 찻잔 5개를 빚어 만든 아들을 위해 가마(5봉 비탈가마)에 불을 지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소성된 작품을 꺼내보고 작품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조언은 철학과 가치관으로 까지 넓혀갔다. 도자기와는 다른 차원의 인문학 특강이었던 셈이다. 책에 있는 지식을 지혜로 활용하는 얘기로 밤을 도왔다.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으나 스승으로서의 아버지는 대단하였다. 신경균에게 도자기 작업으로는 아버지가 최고 장인이었다. 형제 중 혼자 도자기에 혼이 빠졌다.
 경성대 대학원에 등록하면서 명인들을 찾아 만나고 옛 가마터를 찾아다녔다(부친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이었다). 문헌 기록과 소문만 무성한 ‘웅천요’의 ‘웅천사발’을 찾아나섰다. 경남 진해의 웅동면 두동리 보배산 아래에서 이조다완 터를 찾아내었다(1988년). ‘웅천요’(熊川窯)의 흔적을 찾고 이 터를 사적지로 지정하는 작업까지 도왔다. 모대학캠퍼스로 내정된 곳이었기에 관공서와도 다툼이 잦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구결과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야 했다. 1991년 10월 우연한 기회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이곳 기장군 장안읍 하장안의 허름한 초가를 인수하였다. 그간 연구해온 결과를 정리하고 눈문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1992년 학사논문 「진해 웅천 보배산 지방 가마에 대한 소고」로 학위를 받는다. 그해 가마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1993년) 첫 작품을 끄집어 내었다.
 그의 이런 열정은 아버지의 배려덕분이다. 철이 들 때 배우기 시작한 한학과 고전을 바탕으로 중 2 때는 서양화가 차경복 선생에게서 회화의 기초를 다졌으며, 서예와 사군자도 익혔다. 틈틈이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 사진을 배우기도 하였다. 예술가가 되는 종합훈련을 쌓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최고의 장인 아버지의 준비된 후계자 양성코스였는지도 모른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6시까지 16시간을 작업에 매진하는 일과는 지칠만도 한데 그의 체력은 왕성하기 그지없다. 자연속에 살면서 자연을 닮아가는 그의 평심(平心)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그가 찾아가서 또아리를 트는 가마엔 전기불도 수도도 없이 군불지펴 산다. 철따라 지천인 나물을 채취하고 그것마저 모자라면 가까운 5일장으로 장타령 하러 간다. 제철 제고향 식재료야 말로 가장 알차고 건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씨가 구워낸 작품들을 본 사람들이 “어쩌면 아버지 작품과 똑같애. 신경균은 아버지 신정희의 분신이구먼” 아버지 작업을 흉내내고 있었다니, 우선 아버지께 예의가 아니고 둘째 나를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아버지 작업을 피하여 식탁 위에 놓이는 밥그릇을 비롯한 식기를 도자기로 만들기 시작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했다. 부엌에 놓일 그릇이 없을 정도였다. 속된 말로 ‘사장’이 되고도 남겠다. 문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로면 갈밭골 땅을 물색하여 가마를 틀고보니 옛날 아버지의 문경요가 지척이었다. 묘한 인연이었다. 작업장엔 전기도 없이 빨래도 냇가에서 했다. 작업장에는 목물레(木輪臺)를 만들어썼다. 2년 후 수안보 개발하는 여파가 이곳에도 미쳤다. 1996년 경주 덕동댐 안쪽 황룡골에 가마를 다시 내었다. 휴대전화도 신호가 잡히지 않는 오지였으니 전기가 있을리 없었다. 2000년에 옮겨간 장안읍 내덕동 절골 작업장도 전기 전화 없이 촛불, 등잔 켜고 작업했다. 얼른거리는 불빛 때문에 다완 두껑 맞추기에 애를 먹기도 했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그릇들을 만들었다. 문명을 거부한 자연속에서 자연을 닮은 그릇이다. 봄나물 예찬하던 젊은 도예가의 신선함에 놀란 가슴이 그가 만든 그릇들로 채워진다. 2002년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16층)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지 10년만이다. 분청·웅천사발·법기·항아리·사발·접시·다도기등 4백여 점이 순식 간에 애호가들 손에 팔려나갔다. 그는 이 자본으로 집앞 터에 지금의 2층 전시관을 지었다. 가마 윗쪽이다. 화단에는 구절초가 피고 버섯도 손수 키운다. 까치가 둥지를 튼 포구나무와 대나무숲이 전시장과 조화롭다.
 2004년 고흥으로 옮겨갔다. 도자기 태토를 찾아 전국을 방랑하는 셈이 되었다.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의 ‘덤벙분청’으로 이름난 터에 가마를 묻었다. 7봉의 비탈가마를 조선내화벽돌로 축조했다. 봉고(峰高)가 높아, 서서 작업할 수 있는 엄청 큰 가마였다. 아버지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운대리 ‘덤벙분청가마’의 재현이다. 기장의 상장안 분청과 더불어 남한지역에 유명했던 분청가마 터를 찾아온 것이다. 전기 없고 전화도 안되니 일꾼들이 빠져나가 할 수 없이 전기와 통신시설은 가설하지만, 그의 작업실만큼은 자연속에 있었다.
 도예가 신경균 씨 작업방법의 고집스러움과 작업장, 작품전시장의 관리에는 동갑내기 안주인 임계현 씨의 도반(道伴)같은 지극한 모성애의 힘이 크다. 서울예전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경성대 동아리(다향회)에서 신경균 씨를 만난지 벌써 20년이다.
 두 자녀들도 도자기와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다. 3대 도예가의 어렵고 긴 길을 택한 자녀들을 바라보는 젊은 도예가 내외의 따뜻한 눈빛이 한없이 선해 보인다.
 어릴 때부터 유독 부친을 따르며 도자기에 혼이 빠진 소년이 자라면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도예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의 작품속에서 묻어나는 고전과 전통을 지키려는 정신이 오늘의 도예가 신경균을 잉태한 것이다.

이 기사는 2015년 4월 20일 부산제일경제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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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An-Yo / Shin Gyung K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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